기후위기 문제에서 얘기되지 않고 있는 것은, 정작 가장 앞에서 고통을 당하는 비인간 생명들이다.
오늘은 새 먹이대를 다시 채워주고, 강정 생명평화 백배를 틀어놓고 걷기와 기도를 했다.

비인간 존재의 문제라도 인간과 관련된 것부터 말해야지, 그렇지 않은 것은 결국 가진 자들의 배부른 소리라고 말한다.
정작 그러면서도 가장 많이 가지고 가장 배부른 이들의 속임수인 양극화의 사회는 종교처럼 주워섬기고 있다.

배부른 소리가 아니다.
오히려 우린 가장 가난하고 절망적일 때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종교를 찾는다.
어쩌면 우리가 부족했던 것은 종교였음을 다시 깨닫는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내 몸 세포 하나의 통증을 나의 온 고통임을 느끼듯,
가장 작은이의 고통은 우주의 고통이며, 나의 고통도 그 안에서 다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생각해보자. 왜 기후위기 문제는 답이 보이지 않는 문제가 됐는가?
구럼비 같은 자연의 문제는 인간의 문제와 분리된 거라는 종교가,
비인간 존재들을 말하는 것은 배부른 이들의 소리라는 종교가,
결국 해결될 수 있는 문제를 해결될 수 없는 것으로 만든 것은 아닌가.

기후위기 문제는 단지 탄소 감축의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고엽제 문제는 고엽제를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해결된 것이 아니다.
고엽제를 사용하려고 했던 권력은 고엽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더 거대한 지배와 파괴를 이뤄냈다.

인간의 소외와 비인간의 고통이 완전히 분리된 것처럼 여긴 종교가,
정상성과 국적 등의 이유로 언제나 인간 사이에서 배제되는 약자들을 만들어 왔다.

생명평화 백배에서 감옥에 있는 송강호 박사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 땅 거대한 감옥에서 나는 옥바라지 종교로서의 정체성을 다시금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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