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아라. 그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되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 7:6)

거룩은 다름이다. 다름은 열듬함에 대한 위계적 우월성이 아니다. 절대적 구분이다. 아픔이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 되게 하는 것과 같이, 약탈의 세상과 구분되는 가치다. 
페미니즘을 외치는 이에게, 쫓겨남이 없는 세상을 외치는 이에게, 동물권을 외치는 이에게 세상은 조롱하고, 짓밟고, 물어뜯을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는 종차별주의자 였다. 사육하는 개와 돼지가 열등이 된 것은 위계적 권력으로 그들을 억압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열등함의 비유로 사용하는 일은 얼마나 비열한 일인가.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 열등한 조선인들에게 황국 시민의 노예라는 영광을 주겠다고 해보자. 우리는 그들을 물어뜯을 것이다. 그것이 시도가 실패할 지언정 우리가 하는 것은 존재의 투쟁이기 때문이다. 
종차별주의 앞에서 이제 주체는 예수에게서 개, 돼지로 바뀐다. 아픔이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다. 억압 앞의 저항은 그 행위 자체로 성공이다. 세상의 진실을 드러내고 틀어막혔던 외침을 외친다. 우는 자와 함께 운다.

성경이 무오하지 않은 것처럼, 예수가 정말 인간이었다면 무오하지 않다. 
다만 예수는 혐오의 맥락 속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방향성을 제시했다. 그리스도는 그 방향성이다. 
예수를 절대적으로 고정시킬 때, 예수는 고여서 썩는 회칠한 무덤이 될 뿐이다. 그리스도의 방향성으로 해석되는 예수가 지금 여기서 함께 살아간다.

나는 개다. 나는 돼지다. 개와 돼지를 열등으로 만든 그 위계적 거룩과 무가치한 진주에 대해 우리는 물어뜯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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