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명상에 대한 지난 이야기에서는 '비움'이 아니라 '머무름'과 '연결'이 중심에 있음을 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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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명상 간단 가이드 (그리고 명상과 예배와 생활의 관계)

기독교 명상은 예수의 증거를 따라 모두가 신을 직접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원리에 기초한다. 기독교 명상 역시 신, 초월, 영원, 혹은 무(無)를 마주하는 과정이다. 그것을 마주하기 위해 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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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기술적인 이야기를 좀 더 이어가고자 한다.

[1]
들이 쉬는 숨이 깊어지는 것은 내쉬는 숨이 깊어질 때다.
손끝, 머리 끝, 발끝의 모든 세포의 숨까지 천천히 다 내뱉은 후, 급하지 않게 들어오는 모든 공기를 마시면 된다. 마찬가지로 손끝, 머리 끝, 발끝 까지.
호흡은 가슴이 아니라 배로 한다. 그런데 욱체적으로는 배의 근육을 쓰지만, 호흡의 중심은 그 아래 골반이 있는 단전이다.

숨 외에도 몸 역시 중요하다. 내 머리가 끝이 없이 수직으로 하늘로 닿은 줄에 묶여 있음을 느낀다.
빛의 실이 끌어당겨 허리를 쭉 편다.

내 양어깨는 수평선에 대해 어디에도 기울어져 있지 않고 끝없이 수평임을 느낀다. 가슴 근육으로부터 이어져 펼쳐진 날개는 어깨까지로 끝났지만, 마찬가지로 빛의 선이 끝없이 뻗어나가 있다. 가슴이 활짝 펴진다.

이때 배, 머리, 가슴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각 부위가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경직되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분리된 것처럼 자유롭다. 몸을 연결하는 건 단순히 신체가 아니라 무한의 연결성이다.

* 그 몸과 호흡을 통해 우선은 가만히 내 몸을 들여다본다. 집중을 흐트러뜨리는 여러 생각들은 마찬가지로 몸이다. 생각을 막지 말고, 생각의 중심을 차분히 들여다본다.
그 핵심의 한 단어를 찾고, 숨을 통해 손끝으로, 머리 끝으로, 발끝으로 통과하고, 그 생각이 내 몸임을 마음이나 자아가 아닌 전체의 몸으로 받아들이고 안아준다.
어떤 생각이 아니라 기분이나 감정일 수도 있다. 아픔이나 무기력일 수도 있다. 그것을 포착하고 온몸과 연결한다. 만약 그것이 지금 충실한 온 몸의 것이 아니었다면, 단순히 지나가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보내주고 애도하고, 자연스레 더 핵심에 있던 것을 찾아 간다.
특별히 어떤 생각이나 기분이 들지 않는다면, 몸 자체의 알아차림이면 된다.

[2]
내 몸의 알아차림 작업이 끝나면 이제 내가 있는 공간으로 확장한다. 나는 심장이다. 이 공간은 내 영혼의 몸이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 세상은 나의 에너지이자 산소이며, 내가 움직이게 하는 몸이다. 또한 나는 세상의 생명을 순환시키고 유지한다.
몸은 심장 같은 하나의 장가일 뿐이다. 내 영혼은 거대하고 연결되어 있다.
자기장과 같다. 숨을 통해 나오고 드나드는데, 가까운 곳으로 부터 먼 곳까지 원을 그리며 뻗어나가고 들어온다.
그 작업이 충실히 이뤄진다면, 내 몸에 귀기울일 때 심장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공간을 통해 나를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잡념을 버리는 작업이 아니다. 어떤 핵심의 생각, 감정, 몸을 연결시키는 작업이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핵심으로 닿아야 한다.
그 생각과 기분, 아픔이나 무기력은 단순히 내 것이 아니다. 이 방 온 공기와 소리들이 온도들이, 모든 것들이, 이미 나와 함께 하고 있었으며, 한 몸으로 그것을 안아주고 있었다. 우리의 것이었다.
더 거대하고 큰 힘이 나를 감싸주는 것이 아니다. 이미 고통은 압도적으로 온 세계를 짓누르고 있다. 더 무력하고 더 가치없는 드디어 비로소 우리다.
마찬가지로 집중하며 머무르며 연결하며 보내주며 애도하며 알아차려 간다.

[3]
함께 명상하는 너와 나도 그렇다. 따로 분리된 심장이 아니었다.
이제 공간으로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로 확장한다.
내가 내쉬는 숨과 네가 내쉬는 숨은 하나의 숨이다.
우리는 단순히 쓰레기를 내뱉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서로가 연결되게 한, 한 몸의 대우주가 서로를 연결했다. 태초부터.
이제 연결은 공간의 축을 넘어 시간의 축으로 확장된다. 태초의 작고 따뜻한 웅덩이에서 생명은 출발했다.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태초의 작고 따뜻한 웅덩이는 너와 나의 몸이 되었다. 태초의 따뜻한 웅덩이는 몸이 된 사랑이다. 온 우주의 시간을 들여서 너와 내가 만나 몸이 완성되었다.
만남은 단지 둘이 아니라 태초부터 지금까지이다. 그리고 이 마주함의 운명은 앞으로 펼쳐지는 영원을 시작한다.
이때 거대한 것을 생각하는 것은 함정이다.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 지지 않았다. 너와 나의 관계이면 충분하다. 이미 우주의 크기다. 다만 사적관계가 아니라 운명, 부르심에 집중하는 것이다. 운명의 우리는 사적 감정이 아닌 부름받은 사랑이다. 개념의 사랑이 아니라 바로 이 구체적 몸의 사랑이다.

*이제 생각과 기분, 아픔이나 무기력, 몸을 태초부터 종말까지로, 그 영원으로 연결한다. 다시말해 너와 나로 연결한다.
온 우주와 모든 시간이 이미 너와 나로 함께 하고 있었으며, 한 몸으로 그것을 안아주고 있었다. 우리의 것이었다. 사적 관계가 아닌 운명, 부르심의 것이었다. 몸이 된 사랑의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집중하며 머무르며 연결하며 보내주며 애도하며 알아차려 간다.

[4]
이 작업들은 개념이 아니다.
밥을 먹듯 육체적인 것이다.
언제나 같은 것이 없다.
무엇도 같지 않기에 하나이며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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