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할 수 있는 것은 권력을 가졌다는 것이다.
필멸자는 용서할 수 없다.
용서는 세상이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다시 개인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초월하지 않고 힘없음으로 하나되는 것이, 세상 용서의 시작이다.
힘없음으로 하나된다면 어찌 인간이 권력을 용서할 수 있는가. 반대로 그 죄가 제대로 기억되게 하는 것이 애도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건, 그가 역겹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 죄가 제대로 역겹게 되는 것이다. 영원히 기억될 수 있게, 애도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초월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같이 존재라는 죄, 인간이라는 죄를 함께 짊어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 명상 간단 가이드 https://entolre.tistory.com/m/392)
싫은 것을 버릴 필요가 없다. 싫은 것이 제대로 싫어질 때, 내가 아닌 세상이 할 것이다.
용서하지 않을 때, 함께 용서된 몸으로 연합할 수 있다.
오히려 그때 사랑이 뒤틀리지 않는다. 오히려 초월자가 된 것 같은 개인의 용서가 그 개인의 사랑도 뒤틀어 버리고 무언가 또 다른 권력에 취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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